無人(무인) 혹은 美人(미인)의 일기

리뷰

無人(무인) 혹은 美人(미인)의 일기 :::

정유미 | 2000년 10월 10일
조회 2677

천구백구십구년이 조금 넘은 어느 해,
도무지 모든 것이 그치질 않을 것 같던 여름.

하루 -처음

커다란 눈이 몹시 쓸쓸한 남자를 알았다. 좀체 말이라는 걸 하지 않을 것 같은 입을 가진 남자의 직업은 우습게도 인터뷰어다. 내가 멍이든 몸으로 모델 일을 하는 것처럼-.

그 쓸쓸한 눈을, 그 무거운 입을 슬그머니 살피다가....문득 이 남자에게 닿고 말거라는 아찔한 생각이 든다.

하루 -방문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닷가 미인의 가슴 속

남자의 집이다. 하얀 먼지들이 깔끔하게 달라붙은 온통 흰천지 같은 집. 남자를 닮았다고 생각한다. 온통 빗물범벅으로 얼룩진 나를 닦아준다. 내가 부서질까봐 조심스럽나보다. 내 몸의 빗물냄새와 겹겹이 쌓인 남자의 책 냄새가 진동을 한다. 졸음이 쏟아지기에 알맞은 냄새다. 바닥에 마르는 빗물 자국처럼 나는 이 남자에게 스민다.

하루 - 숨결

"당신은 내가 가고 싶어하지 않는 바로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며 내가 없는 거기에서 나를 사랑한다." 남자가 이런 말을 중얼거린다. 못 알아들은 척 되물었지만 난 남자의 말을 되새김질하고 있다. 이 남자에게 사랑을 주든 상처를 주든 그 어떤 무엇이건 간에 나는 그를 아프게 할 것이다.

오늘은 좀더 그를 쓸어안아야겠다.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하루 - 외출

그에게서 전화가 온다. 어제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난 정말 바보 같은 여잘까? 하지만 어떤 절망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만날 것이다. 하얀 먼지를 일으키듯 이남자의 집안을 휘둘고 돌아다닌다. 남자가 가만히 앉아 나를 지켜본다. 애써 그 눈을 피한다. 무신경한 듯, 남자란 사람은 조금도 내게 없는 것처럼 나는 무심히 뛰어 나간다. 문소리를 조금 더 크게 내본다.

하루 - 의문

남자는 나에게 묻지 않는다. 그게 내가 언제든 이 집에 올 수 있는 이유다. 내가 비틀대며 하루를 잊은 척해도 남자는 화내지 않는다. 어떻게 그토록 참는 법을 배운 걸까. 내가 묻고 싶다. 그런데, 남자의 무릎에서 어정대다가 남자가 눈에 핏발이 맺히도록 악다구니를 무는 걸 알았다. 절대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이제 나는 몸으로 남자를 느낄 수 있다.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헐벗겨지는 몸이 누군가에게는 끊임없는 살가움이 된다. 제기랄.

하루 - 산책

모처럼 남자와 밖을 나선다. 건너편에 남자가 걷는다. 저벅대는 걸음이 늙은 짐승처럼 처량맞아 보인다. 남자는 저렇듯 세상 속에서는 의미가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질문을 던지는 직업을 택했는지도 모르지. 정작 자신에게 돌아올 대답이 아무것도 없음을 알면서도 말이다. 내 안에 살길 원하는 남자에게 답을 주고 싶다. 행여 이맘이 달아날까봐 어둔 거리에서 가슴을 재쳐 보여줬다. 그대에게 주는 선물이라며!

하루 - 죄책

나는 지금 누구에게 소리지르는가. 내가 물어뜯고, 쥐어짜고, 두들겨주고, 원망하며 헐뜯고 싶은 사람은 이 남자가 아니다. 아니 남자가 맞다. 아니 이 남자가 아니다. 나다. 바로 나다.

이렇게 흠씬 두들겨 맞고서도 그를 사랑하는 나다. 지금 나는 나에게 화를 내야한다. 나를 몰아치는 그와 나를 온껏 받아내는 이 남자를 견디지 못하는 내게 소리를 질러야 한다. 하지만 알량한 맘이 나를 자꾸 밖으로 내몬다. 삭힐 수 없는 감정이 자꾸 밖으로 나와버려.

하루 -無言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오지 않는다. 하루가...며칠이 지났는데도. 이젠 나를 저주할 재미조차 잃었나. 남자가 나를 바다로 데려간다. 그의 생각은 잠시 미루기로 하자. 바다에서도 남자의 집 냄새가 난다. 내가 처음 남자의 집에 갔던 날의 냄새. 남자와 나는 서로만 보기로 한다. 말이 필요하지 않다. 힘겨운 마음이나, 복잡한 생각이 필요하지도 않다. 이곳의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있는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닿는다. 약간의 바람이 불어주면 더없이 좋으련만...

하루 - 이제 나도 남자가 아프다

내 뺨에 눈물이 흐른다. 사랑을 담을 수 없을 것 같던 내 눈에 눈물이 고여 흐른다. 남자의 따스한 손이 내 안에 고여있던 마음을 내 부질없음을 깨운다. 지독한 악몽을 깨어나는 건가. 그래서 공기의 울림을 빌어 소리내본다. 사랑해. 남자에게 말하는 내가 들린다. 비로소 사랑은 말과 귀로 완전해지고 남자는 내 사랑을 받는다. 이제 나도 이 남자가 아플테다.

하루 - 아가처럼

내 미움, 내 설움... 내 전부인 그가 죽었다. 내가 도려낸 내가 없는 그는 생기를 잃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내 안의 그를 다시 도려냄으로 나를 살게 하지 않는다. 내가 심어준 심장을 가진 남자는 좀 더 영리해졌다. 내의지로는 삶을 포기하지 못하게 한다. 나를 제 몸 위에 앉혀놓고 숨을 조인다. 마지막으로 그의 쓸쓸한 눈을 본다. 남자가 자꾸 가물거린다. 아가처럼 그에게 기대어 가는데 점점 식어 가는 내 몸에 남자의 몸은 너무 뜨겁다.

...더 이상의 기억은 남자의 기록에 남을 것이다. 이 글이 그에게 들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유미 님의 다른 기사 보기 >>

Readers' Comments

내 의견 쓰기

More Articles to Explore

<로망스> 그 처녀의 이름은 분명히 코델리아 (2000/12/06)

<성스러운 피> 아무말 없이 다가온 그녀... (2000/11/30)

無人(무인) 혹은 美人(미인)의 일기 (2000/10/10)

<동감> 그리고 그녀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2000/10/10)

<와호장룡> 무협의 틀 속에서 다다른 득도의 경지 (2000/09/12)

기사목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