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칙왕> 현실과 꿈의 공간이 만나다

리뷰

<반칙왕> 현실과 꿈의 공간이 만나다 :::

박경미 | 2001년 10월 05일
조회 4731

은행원, 반칙 레슬러 되다!
현실과 꿈의 공간이 만나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하루 시작은 어떠한가? 빡빡한 지하철에서 사람에 치이고 치여, 정해져 있는 길을 따라 직장으로 이동한다. 영화 속 주인공인 임대호(송강호 분)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반복적이고도 규칙적인 업무가 진행되는 은행이 그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다. 그의 이러한 일상적 공간으로서의 현실은 삭막하고 건조하기만 하다. 자연의 적자생존 법칙을 외치며 공포의 헤드락을 걸어오는 직장의 상사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그는 이러한 현실을 벗어날 수 없다. 답답하고 자신이 비참해 보이기도 하지만, 냉정하게도 현실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던 그가 헤드락을 벗어나고자 레슬링을 배우기 시작한다.

은행원에서 레슬러로의 변신

그가 레슬러가 된 이유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행해지는 상사의 헤드락 때문이었다. 심지어 상사의 헤드락은 가장 개인적이여야 하는 화장실이라는 공간에서조차도 피해 갈 수 없다. 빠져나갈 수 없게 자신을 조여오는 헤드락에서 벗어나려는 그의 노력은 결국 그를 반칙 레슬러로 만들고 만다.

레슬링이 이루어지는 사각의 링은 - 임대호에게 있어서는 - 만들어진 반칙 도구와 짜여진 각본대로 움직이는 허구의 세계이다. 그는 허구인 꿈의 세계에서 화려한 의상을 입고 조명발을 받으며 주인공이 된다. 즉 은행원에서 레슬러가 되는 것은,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공간에서, 만들어지고 허구적인 꿈의 공간으로의 변신이다.

낮에는 은행원, 밤에는 레슬러로서의 이러한 변신은 다른 영화에서의 변신 모티프들과는 차이점을 지닌다. 변신이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은 영웅의 이야기일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 같은 그런 영웅들은 평범한 사람이지만, 변신을 하는 순간 초월적인 영웅이 되어 악을 징벌한다. 폭발하는 화산을 막으며, 비명을 질러대는 여주인공을 구하는 정의의 영웅이 그들의 역할이다.

그렇다면 임대호가 밤마다 가면을 쓰는 레슬러로 변신하는 것은 어떠한가. 영웅적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가 연습하는 것은 정의로운 영웅이 아니라, 반칙을 하여 볼거리를 제공하는 반칙 레슬러이다(언제나 우리의 영웅들은 반칙을 당할지언정 행하지는 않는다).

하필이면 왜 반칙?

반칙은 어쩌면 모범적이지 않은 일탈적이고 도발적인 행위이다. 왜 반칙인가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서는 다시 공포의 헤드락으로 돌아가야 한다. 헤드락은 기술은 건 상대보다 힘이 약하면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러나 레슬링 관장이 가르쳐준 헤드락 푸는 방법은 어의 없게도 그러나 설득력 있는 간지럼 태우기이다. 어찌 보면 그것은 힘이 없는 사람들이 할 수밖에 없는 방법이기도 하다.

상사의 일방적 헤드락에서 빠져 나오려면 그는 직장에서 힘을 기르거나, 힘이 아닌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직장에서 힘을 기르는 것을 실적을 올리는 길이다. 그러나 그는 업적부진으로 퇴출 위기에 처해있는 사원이기 때문에 그가 힘을 기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자연히 힘이 아닌 다른 어떠한 방법이 되는 것이고, 영화에서는 반칙으로 표현된다.

현실과 꿈의 만남

낮에는 은행원으로 밤에는 레슬러로 변신을 꾀하던 주인공의 두 공간은 어느 순간부터 한 공간에서 만나려 한다.

레슬러가 된 그는 가면을 쓰고 현실로 나온다. 그러나 가면은 그의 꿈에서 존재하는 것이었기에 현실에서는 인정받지 못한다. 아버지는 그의 가면 쓴 모습에 핀잔만 주고, 주인공이 짝사랑하는 직장 동료도 그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가 가면을 쓰고 현실의 세계로 나왔지만, 그것은 현실과 그의 꿈 사이에서의 괴리감만 더 부각시킬 뿐이다. 그가 가면을 쓰고 지하철에 앉아 있는 씬을 생각해 보자. 그는 현실에 속하는 일상적인 지하철에서 양복을 입고, 꿈에 속해 있는 가면을 쓰고 앉아 있다. 이 장면은 비극을 극대화시키면서, 또 한편으로는 관객이 괴리감을 느끼게 만든다. 그가 입고 있는 옷과 쓰고 있는 가면의 부조화가 그러하며, 또 영화의 초점이 그에게만 맞추어져 있는 것이 그러하다. 이 장면에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화면에서 사라져서야, 후경의 배경과 인물에 초점이 맞추어져 선명해진다. 꿈으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다.

반칙 레슬러로써 경기가 있는 날 현실과 꿈은 다시 만난다. 유비호와의 레슬링은 각본대로 짜여진 쇼의 세계이자, 만들어진 세계이다. 경기는 막바지에 이르고, 감정은 고조된다. 그러나 주인공은 짜여진 각본대로 경기하기를 거부한다. 그러다 주인공의 가면이 찢겨나가고 그의 실제 모습이 드러난다(가면은 벗겨지게 마련이다). 드러난 실체. 가면이 벗겨진 순간, 꿈의 공간이던 사각지대가 현실의 살벌한 생존터로 바뀌게 된다. 꿈과 현실의 공간이 또다시 만나는 순간이다.

이번의 현실과 꿈의 만남은 전자의 만남과는 다르다. 전자의 만남이 꿈으로 인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의 괴리감을 보여준다면, 후자의 만남은 그 꿈에서 벗어나야 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꿈이라는 것이 하나의 자극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궁극적인 해결방법이 되지는 못한다. 어린 시절의 동경과 꿈만으로 현실을 살아가지는 못한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공간이 꿈의 공간이 아닌 현실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거칠게 말한다면, 가면이 찢기어 지고 나서야 경기는 무승부로 결론 내려진다.

레슬링 경기 후, 그는 상사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그가 상사를 향해 달려나갈 때 넘어지는 모습은 웃음을 자아내는 하나의 해프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사와의 승패가 아니다.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날지도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맞장 한번 떠보겠다는 시도 자체이다. 그리고 심각해질지도 모르던 상사와의 대결이 우리에게 웃음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전작 <조용한 가족>에서 '코믹 잔혹극'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낸 김지운 감독은 <반칙왕>에서 현실과 꿈이라는 대비되는 소재를 통해 소시민의 일상을 보여준다. 감독은 빠르게 변화해 가는 세상에서 잊혀져 가고 있는 것들에 대한 향수 어린 꿈을 꾸지만, 꿈은 꿈 일뿐이라는 사실을 조용히 역설하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