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itation of Life

월드컵의 낮과 밤


글: 양유창
2002년 06월 17일

사실 요즘 같으면 영화 사이트에 글을 쓴다는 게 참 재미 없는 일이다. <취화선>과 <마리 이야기>의 프랑스에서 쾌거가 있지만, 프랑스가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마당에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월드컵 과대망상에 빠진 내 조급함 때문일까.

오늘 Clazziquai의 'The Gentle Rain'과 'ChiChi'를 들으면서 모처럼 열기를 식히고 있다. 이번 달에 있는 프랑스, 중국, 라틴 아메리카 영화제 중 일부분에라도 참석해볼 예정이다. 다음달에 있을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 개막작이 <슈팅 라이크 베컴>이라는 말을 듣고 역시 월드컵 효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국을 마법에 걸린 것처럼 만들어놓은 월드컵은 가히 폭발적이다.

Be the Reds ⓒCMC
난 FIFA의 지나친 상업성과 월드컵 이면의 그림자들에 대해 경계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월드컵을 부정할 만큼 크다고 보지는 않는다. 백인 히딩크와 동남아인 노동자들의 신분차이도 고민할 부분이지만, 히딩크가 보여준 능력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월드컵이 심어주는 거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역시 약소국에 자신감을 심어주는 효과라는 면에서 긍정적이다. 100% 코스모폴리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자유롭게 공간이동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지 않는 한.

월드컵 기간 중에 두 경기를 관람했다. 인천과 수원에서 조별리그와 16강전이었다. 경기장에서 직접 보는 것이 좋은 이유는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선수들의 움직임을 볼 수 있다는 것과 각 팀의 전술과 빈 공간의 움직임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경기를 분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어제 스페인 대 아일랜드 경기처럼 빅게임이 열릴 때면 경기장의 뜨거운 열기는 관중을 신나게 만든다. 마치 비디오로 보는 영화와 극장에서 보는 영화가 다른 것처럼 경기장을 직접 찾는 재미 역시 TV 화면에 비견할 바가 못된다.

나처럼 축구를 즐기는 팬들에게 뿐만 아니라 축구에 관심 없던 사람들에게도 이번 월드컵은 특별할 것이다. 반백년 만에 처음 맛본 승리의 순간으로 전국이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으니까. 난 한국팀이 객관적 실력으로 충분히 이번 월드컵의 강팀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본다. 강력한 조직력과 지칠줄 모르는 체력, 발재간을 갖춘 선수들, 뛰어난 전술 소화능력, 거기에 마법을 거는 것 같은 응원의 힘은 어떤 팀이라도 겁을 먹을 만하다. 16강에 만족하지 말고 여툰 힘을 채잡아 목표를 높이 설정하고 그 자격을 보상받기를 바란다. 연봉 수천만원짜리 선수들이 공 한 번 찰 때마다 수천만원이 왔다갔다하는 백만장자들과 싸워 이긴다는 것이 얼마나 통쾌한가.

사람들이 월드컵에 열광할 때 한편에서는 다른 일도 일어나고 있었다. 6.13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압승하는 불운이 있었고, 미국에서는 '더러운 폭탄' 사건도 있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올 겨울 카슈미르 국민투표에서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전쟁 위험을 부추겼으며, 중국의 대륙기질은 베이징에서 한국 영사관을 폭행하고 오리발을 내밀기까지 하였다. 월드컵에 모든 것을 묻어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방송 3사가 미친 듯이 월드컵에 열을 올리고 승리에 도취되어 있을 때에도 세상은 여전히 복잡한 곳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월드컵 경기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Believe in Jesus'와 '예수천국 불신지옥' 이라고 적힌 붉은색 십자가들이 많이 눈에 띈다. 그들은 외국인 관광객들을 위해 친절하게 영어로 'Believe in Jesus, or you'll go to hell' 라고 외친다. 그 외침이 너무 살벌해서 덜컥 겁이 날 정도였다. 야간 경기가 끝난 후, 어두운 밤 하늘에 매달려 있는 붉은 십자가의 물결은 마치 여기가 지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왜 이들은 외국인에게까지 그토록 열성적으로 예수타령을 늘어놓을까. 그렇게 무서운 예수타령에 과연 누군가가 설득되기라도 한단 말인가. 오히려 그들이 착한 기독교 신자들에게 굴레를 씌우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인가.

경기장 앞에서 독일인 방송기자와 카메라맨이 'Believe in Jesus'라고 적힌 휘장을 두른 한 노인을 뒤좇아가는 것이 보였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한국의 독특한 문화로 보였을까. 과연 어떤 보도가 나갔는지 궁금하다.

경기가 끝난 후 4만여명의 관중이 한꺼번에 경기장을 빠져나오면 그곳은 아수라장이 된다. 대중교통이 없는 곳에서 충분하지 못한 셔틀버스를 타려고 전쟁이 시작된다. 우리의 훌륭한 문화는 서울극장과 비슷해서 극장에 들어갈 때는 엘리베이터, 내려올 때는 좁은 계단이다. 편하게 경기장으로 들어가지만 돌아오는 길은 아주 험난하다. 수도권은 그나마 나은 편이고, 지방도시는 배정된 셔틀버스가 많지 않아서 사람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수억을 들여 지어놓은 경기장인데 앞으로 어떻게 사람들을 그곳으로 끌어모을 것인지 교통에 대한 지혜가 필요하다.

스포츠를 통해 정치를 가리려던 시대는 88올림픽으로 끝났다. 지금은 스포츠를 제대로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하는 시대다. 평균 6시에 퇴근하는 사람들을 위해 8시 정도에 경기를 시작하고, 맥주 한 잔 들고 경기장에 들어가서 신나게 자기 팀을 응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주5일 근무제와 노동시간 단축은 문화 및 스포츠계의 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4700만명이 동시에 자발적으로 '대~한민국'을 외치는 이 시점에 불가능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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