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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itation of Life


[리버스] 디지털... 인정사정 볼 것 없어 :::


양유창 | 2000년 05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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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난 디지털 영화를 찍고 싶다. <빤스 벗고 덤벼라> 같은 영화도 좋고 <스타워즈 두 번째 에피소드> 같은 영화도 좋다. 그렇다면 망설일 것 있나? 그냥 예전처럼 카메라 한 대 들고 나가서 찍으면 그만이지. 배우들이야 알음알음 구하면 되고 친구들과 촬영을 같이 하고, 그리고 컴퓨터로 나머지 작업을 하면 그만 아닌가. 새로운 시도를 앞두고 어떤 내용을 담는가 하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할까. 주황색 츄리닝 차림에 운동화 신고 가면 뒤집어쓰고 나는 울트라맨이다 라고 외치면 그게 바로 "디지털 울트라맨"이고, 사람들 빤스만 클로즈업해서 100컷 정도 리드미컬하게 나열하면 그게 바로 베네통식 AIDS 예방 다큐멘터리가 되겠지. 너무한다구? 그럼 당신도 한 번 찍어보시라. 당신 몸뚱아리를. 제목은 살아있는 육체들의 귀환.

이번달 리버스의 주제는 디지털과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이다. 누구나 디지털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아무도 디지털 영화가 우리 영화문화를 어떻게 바꾸어놓을 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사실 영화를 보는 입장에서는 그게 디지털로 찍혔든 35mm 필름으로 찍혀있던 아니면 8mm 비디오로 찍었든간에 별로 중요하지 않다. 보는 입장에서는 오히려 내용이 더 중요하다. 영화의 소재나 주제, 출연인물, 누가 찍었는지.. 등이 주 관심사다. 아이러니다. 찍는 사람에게는 매체의 종류가 중요하지만, 보는 사람에게는 내용이 더 중요하다. 이렇게 인류 초기부터 제기되어온 형식과 내용의 문제는 디지털 전환기인 21세기 초에도 되풀이되고 있다.

사실 필자가 이렇게 디지털 영화 찍고 싶다고 설치고 있지만, 누구나 영화를 찍는 시대가 누구에게나 좋은 것만은 아니다. 기성 감독들은 물론 극장주들, 정부, 영화관련 단체들 - 이를테면 영화인협회 등, 영화홍보사, 연극인들, 그리고 굴뚝산업 종사자들에게 디지털은 별로 달갑지 않을 수 있다. 한마디로 밥그릇 뺏기는 일인 것이다. 다만, 디지털이 있어 좋은 사람들은 영화동호회, 인터넷 사이트 운영자들, 방송국 PD들, 그리고 컴퓨터 업계 종사자들이다. 요즘들어 이런 사람들의 열기는 뜨거워서 하루에 한 개 꼴로 인터넷 방송국이 개국하고 있다고 하니 거의 <볼륨을 높여라> 적인 사고가 퍼져가고 있는 것 같다.

이번달 에디토리얼에서 하고 싶었던 또하나의 코멘트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이다. 요즘들어 한국영화가 국제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이야기하고 있다. <춘향뎐>의 깐느진출, <오! 수정>의 호평, <박하사탕>의 소규모 영화제 수상 등.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단연 압권은 역시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이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이명세 감독이야말로 세계 무대에서 통할 만한 국내 유일의 감독이라고 생각해왔었는데, 점점 그 실현을 보는 것 같아 기쁘기 그지없다. 다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은 서구 평론가들에게 동아시아는 중국과 일본 위주로 소개되어 있다는 것 - 따라서 그들이 한국영화를 바라보는 시각도 중국어권 영화 혹은 일본영화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가령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주인공 '우'형사는 서구 평론가들이 볼 때에 '존 우(오우삼)'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해석되고, 영화 전체는 왕가위와 임영동, 서극, 이와이 슌지, 츠카모토 신야, 스즈키 세이준, 세르지오 레오네, 샘 페킨파, 심지어 빈센트 미넬리의 영향력 하에서 만들어져 있다. 이쯤되면.. 한국영화라고 부르기가 조금 민망할 지경이다.

하지만, 뭐 그런들 어떠랴.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랴. 우리 눈을 즐겁게 하는 영화 많이 만들어 명성도 얻고 재미도 얻으면 그만인 것을. 디지털 영화도 많이많이 찍고, 1인 방송국도 많이많이 생겨나서 <아메리칸 파이>처럼 자기 실생활도 공개하고, 또 영화제 많이많이 열어서 상도 많이 주고, 영화에 굶주린 사람처럼 부르릉부르릉 영화발전을 위해 열변을 토하고, 잘린 영화 붙여서 다시 들여오고, 한국영화 내다 팔아서 자동차 몇 대 더 들여오면 되는 것을. 그러다보면 서구에서도 한국영화만을 위한 계보도를 따로 만들어주겠지. 정말이지 '빌리지 보이스' 단신 코너에 조그맣게 올라있는 볼 만한 외국영화 상영작 코너 한구석에 자리잡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평을 읽는 기분은 영 아니올씨다니까.

한 가지 명심할 점. 영화발전도 좋지만, 우리 언론과 국민들 생각해서 다른 것들도 무시해서는 절대 안된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잘해야하는 민족으로 알려져 있다. 언론에서 야구, 축구는 물론 승마, 하키, 핸드볼, 역도를 보도해도 역시 부각되는 것은 정부의 지원부족이고, 저변확대가 시급하고, 시설이 미흡하다. 마찬가지로 예술, 대중문화, 공연을 보도할 때도 공통되는 말은 반짝스타에 대한 칭찬, 그러다가 시들해지면 기초가 부족하고, 지원도 부족하고, 관계자들의 인식변환이 시급하다는 것으로 태도가 돌변한다. 디지털 전환기를 맞고 있는 한국영화여! 현재진행형으로 잘나가는 한국영화여! 조심하자. 꺼진불도 다시보고, 스크린쿼터도 다시보자. 언론을 밟을 때는 확실히 조지고, 인터넷을 봉으로 생각하지 말아라. 자기영화 찍을 때는 확실히 찍어두자. 찍을 수 있을 때 찍자. 중흥기가 언제까지 갈 지 아무도 모른다. 인정사정 볼 것 없어!






양유창
마음으로부터 그림을 그립니다. 무의식으로부터 시를 씁니다.
비밀스럽게 여행을 떠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운명과 미래를 혼동하지 않습니다.
무심코 떨어뜨린 책갈피에서 21세기가 느껴집니다. 그곳은 슬픈 신세계입니다.
이별이란 말은 너무 슬퍼 '별리'라고 말합니다.

BLOG: rayspac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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