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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itation of Life


절대권태 :::


양유창 | 2002년 01월 09일
조회 6141


<나쁜 남자>, <디 아더스>, <아프리카> 이렇게 세 편의 영화가 개봉을 준비중이다. 논쟁적인 <나쁜 남자>, 열정적인 <디 아더스>, 재미있는 장난 <아프리카>까지 이번주는 재치있는 소규모 영화들이 동시에 선보인다. 그리고, 계속해서 <공공의 적>, <2009 로스트 메모리즈>, <블랙 호크 다운> 등의 대규모 라인업이 기다리고 있다. <반지의 제왕>은 한국에서도 열풍을 일으키고 있으며, 이 영화 3부작 모두를 이미 일본의 10분의 1 가격에 수입한 태원엔터테인먼트는 앞으로 2년 동안 제작할 영화 다 말아먹어도 끄덕없을 거라는 여유있는 돈계산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난 영화가 재미없어졌다. 며칠 전 <공공의 적> 기자시사회에서 함께 참석한 영화인회의의 영화배우들을 보았을 때에도 난 아무런 감흥이 없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예전 같으면 배우들에게 신기한 매력이라도 느꼈을 터였지만, 이제 그런 것도 더이상 없었다. 그나마 2주 전 <아프리카> 기자시사회에서는 이요원이 머리에 웨이브를 주니까 더 나이들어 보인다고 생각했고, <나쁜 남자> 시사회에서는 극장 로비에서 나를 계속 쳐다보던 서원(A)이 실제보다는 스크린 속에서 더 예뻤다는 생각을 하기라도 했는데, 이 날은 이정재가 입고 온 자켓이 멋있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고, 생각보다 얼굴이 작았던 김윤진에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더 심했다. <공공의 적>은 아주 에네르기가 넘치는 파워풀한 영화다. 폭력적인 장면은 정말 남성 호르몬이 펄펄 끓어 오른다. 그런데 난 주먹이 오가는 중간에 나오는 그 퍽퍽 소리가 정말 귀에 거슬렸다. 그리고 영화가 빨리 끝났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내가 영화에 집중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2시간 내내 집중한 탓에 영화가 끝나고 난 뒤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는 마치 다른 세계를 막 빠져나온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기분은 지난 2시간 동안 몰입했던 또다른 세계가 즐거웠다기보다는 그저 '권태'를 잊게 해준 시간이었다는 감정에 지나지 않았다. 예전에는 사는 게 재미 없어도 영화에서만큼은 재미를 찾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렇지도 않다. 영화를 보는 것 역시 별로 재미없는 일이다.

아마도 이러한 증상은 <이것이 법이다>를 볼 때 시작된 것 같다. 이 영화는 한 마디로 말도 안되는 영화였다. 다른 건 다 차치하고서라도 컴퓨터 전문가가 몇 번의 빠른 손놀림으로 바이러스를 고치고 범인을 추적한다거나 공무원이 전화 한 방에 수년 전 범죄자 파일을 즉각 찾아준다는 것이나 '닥터 큐'라는 웃기지도 않는 이름에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을 '일심회'라는 조직까지, 한 마디로 경찰판 <조폭 마누라>였다. 기대했던 영화에 실망하는 것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만, 이 영화는 맥이 빠지게 만들었다.

비단 영화 뿐만이 아니다. 영화라는 매체를 뭐 대단한 것인양 생각하는 영화인들의 근엄한 목소리들을 신문을 통해 읽으면서, 또 독립단편영화제 개막식에서 아마추어 감독들이 자기가 뭐 대단한 예술가인양 거드름 떨며 '돈 같은 거 필요없어요'라고 말하는 소리 들을 때, 한때 좋아하던 이상은이 겸손을 잃어버리고 자신감과 무지에서 비롯된 오만을 혼동할 때, 한겨레에 매주 연재되는 이효인 컬럼에서 도대체 이 사람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라고 느껴질 때, 정말 절대권태를 느낀다.

절대권태는 나를 밖으로 내몬다. 좁은 틀에서 벗어나 멀리서 다시 나를 바라보도록 부추긴다. 백엔드를 떠난 빌보가 프로도에게 반지를 건네주었던 것처럼, 이실두르의 마법을 풀기 위해 프로도가 사우론의 가늘고 긴 악령의 불덩이를 헤쳐나온 것처럼 나는 중간계를 떠나 봄바딜과 엘프가 사는 다른 세상을 만나야 한다.

사실 J.R.R.톨킨의 [반지의 제왕]은 유럽의 고대신화를 혼합하고 각색한 것이다. 특히 스칸디나비아지역의 신화가 나즈굴, 모르도르, 사우론 등의 이름에 그대로 묻어나 있다. 이렇게 유럽적인 것을 한 영국 작가가 2차대전 후 소설로 만들어냈고, 이후 50년만에 미국의 기술과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는 전세계에서 소비되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동시에 유럽 북구의 고대 신화를 접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이런 과정이 그리 긍정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미국식 자본주의를 앞세운 문화의 대중화와 평준화는 고유문화라는 개념을 점차로 사라지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계화의 긍정적인 부분보다는 부정적인 문제점이 더 클 것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유로화의 등장 역시 그다지 달갑지 않게 보는 편이다. 유럽은 뭉쳐서 미국에 대항한다고 선언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지구적으로 또하나의 패권을 만드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한 놈이 삥뜯어가다가 이제 두 놈이 삥뜯기 시작하면 작은 국가들은 거덜난다. 또 두 놈이 싸우기라도 할라치면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파편에 맞아 사망하는 수도 있다. 따라서 작은 국가들도 뭉칠 수밖에 없는데 대부분의 작은 국가들은 뭉칠 힘이나 능력이 부족하다. 왜냐하면 20세기를 식민지로 보낸 국가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국제적인 정세를 인식해 합리적으로 대처할 만큼 아직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 생각은 기존의 큰 국가들이 여럿으로 쪼개지는 것이 최선이라 보지만, 현실은 반대로 가고 있는 것 같다.

최근 문학상 접수에 응모한 작품들의 면면이 대부분 '옥탑방에 혼자 사는 남자가 비디오나 보며 라면 끓여먹는 이야기'라고 한다. 아마도 대부분의 작가 지망생이나 소위 예술가(?) 지망생이라는 사람들이 그렇게 비진취적이고 자기탐닉적인 생활에만 묻혀 살고 있으니 문 밖을 벗어난 소재를 찾을 수 없음이리라. 또, 사법연수원의 정원이 늘고 있는 가운데 고시원에는 빈 방이 없다는 소리도 들린다. 다들 편하게 한 자리 차지하려고 하고, 방 한 구석에 앉아 쉽게 인생을 이야기하려 한다.

다른 세계를 보고 싶다. 월드컵 기간 중에 북한에서 '아리랑'이라는 매스게임을 개최하고 국제관광객을 모집한다고 하는데 남한 관광객도 초청할 것이라고 한다. 통일부에서 현명하게 대처하기를 오매불망 기대하고 있는 중이다.






양유창
마음으로부터 그림을 그립니다. 무의식으로부터 시를 씁니다.
비밀스럽게 여행을 떠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운명과 미래를 혼동하지 않습니다.
무심코 떨어뜨린 책갈피에서 21세기가 느껴집니다. 그곳은 슬픈 신세계입니다.
이별이란 말은 너무 슬퍼 '별리'라고 말합니다.

BLOG: rayspac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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