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서울유럽영화제 메가필름페스티발
글: 이종열
2003년 11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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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3일 목요일
-바보들의 집-
러시아와 체첸의 민족분쟁을 희비극으로 그려낸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의 <바보들의 집>( 2002년, 104분, 러시아·프랑스 제작)은 실화에 기초해, 슬픈 정서를 영화 속 포탄처럼 심중에 떨어뜨린다. 러시아와 체첸 국경에 위치한 정신병원. 오프닝은 뜻밖에도 저명한 가수 브라이언 아담스(!)의 출연과 노래이다. 뮤직비디오 식으로 정신병자 제나의 환타지를 보여주는 이 장면은 이 영화가 평화로운 세계를 간절히 바란다는 걸 '착하게' 보여준다.
<바보들의 집>은 에밀 쿠스트리차가 그러했듯이, 전쟁비극을 시종 시끌벅쩍 하고 희극적인 톤으로 그려낸다. 그러나 희극적일수록 영화는 더욱 강력한 비극성을 키워간다. 러시아와 체첸 부대 우두머리 사이에 벌어진 에피소드에는 이 희극 속의 비극성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 분쟁 중만 아니었다면 모두가 친한 사이가 될 것이란 걸 보여주는 이 웃다가 슬퍼지는 장면은 매우 비극적이다. 제나가 아코디언을 치는 것이나 포화 속 환자들의 우스꽝스런 장면보다 나는 이 장면이 가장 아팠다. 헬기가 추락하고 아수라장이 된 정신병원에 희망은 다시 꽃필 수 있을까? 브라이언 아담스는 계속해서 제나에게 로맨틱한 노래를 불러줄까? 전쟁이 그치지 않는 세상이 뒤숭숭하기에 영화는 낙관적이지 않다. 전쟁 우화 <바보들의 집>은 2002년 베니스영화제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 [★★★]
10월 24일 금요일
-창문을 마주보며-
<창문을 마주보며>(페르잔 오즈페텍 감독, 2003년, 106분, 이탈리아·영국·터키·포르투갈 제작)는 달콤한 짝짓기에 안달인 최근 한국영화를 창을 마주해 씁쓸히 바라보고 있는 느낌을 준다. 영화제를 통해 근래 마주했던 대개의 유럽영화는 소원해진 인간관계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한국의 청춘들이 짝을 못 찾아 괴로워할 때 창을 마주한 유럽의 영화들은 가족과 주변 관계에서 힘겨워하고 있던 것이다.
<창문을 마주보며> 또한 여유 없이 삶을 살아가는 한 가정을 통해 현대인들의 쓸쓸한 인생을 들여다보고 있다. 창을 마주 본 앞집 남자로부터 사랑의 자극을 받지만 결국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하기로 하는 지오바나. 그녀가 나약한 남편과는 달리 잘생기고 능력있는 앞 집 남자를 거부하게 된 계기는 마주한 남자의 집에서 바라본 자신의 모습과 가족의 모습 때문이다.
영화의 한 축엔 다비드라는 노인과의 관계가 있다. 그는 제빵기술자로 유태인으로서의 아픔과 사랑을 이루지 못한(동성애) 슬픔이 있다. 이런 그는 최후를 맞기 전 지오바나에게 앞으로 당신이 하고 싶어하는 것을 하며 살라고 조언한다. 타인과의 관계는 어떻게 해서든 영향을 주고받기 마련. 무감각했던 삶에 찾아든 유혹을 떨쳐버린 여자는 조용히 삶에 감각을 얻어가기 시작한다.
영화의 마지막은 지오바나가 관객을 향해 씁쓸하게 미소짓는 얼굴-눈 클로즈업이다. 가슴을 아프게 하는 이 장면은 함께 하며 자신의 처지를 봐준 관객을 떠나보내기 싫어하는 듯한 그 미묘한 표정 속에 힘겨우나마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의 어쩔 수 없음을 전달하고 있다. 영화가 끝나고 나도 지오바나는 또 만만치 않은 삶 속에 던져져 힘겨운 나날들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오늘도 너무 삶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를 만났다. 힘들어진다. <창문을 마주보며>는 2003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에서 대상, 감독상, 신인여자연기상을 2003 이탈리아 도나텔로상에서 최우수 작품상, 남우상, 여우상, 음악상 등 5개 부문을 석권했다. [★★★☆]
10월 25일 토요일
-나는 소녀가 아냐-
나는 이십대 초에 얼마나 울어보았던가? 막막한 미래, 답답한 미래, 두려운 미래…. <나는 소녀가 아냐>는 부모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스무살 뮤리엘의 고된 성장기를 그려내면서 다른 두 중년 여성의 여전한 성장통을 함께 담아내고 있다.
도로시 반 덴 베르그 감독은 여성 감독으로서의 섬세한 연출력을 보여준다. 뮤리엘이 사회를 몸으로 부딪혀가며 겪는 여러 현실적인 문제와 이성문제, 그리고 중년이 되어서도 여전히 잡지 못하는 꿈 등을 나 같은 남성관객도 흡수하게끔 잘 그려내고 있다.
서울유럽영화제의 좋은 점은 <나는 소녀가 아냐>처럼 평소 개봉관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유럽의 (영화적으로)낯선 나라의 수작을 소개해 준다는 데에 있다. 벨기에와 네덜란드의 합작품인 <나는 소녀가 아냐>는 2002 로카르노 영화제 청소년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
-인 디스 월드-
소형 디지털 카메라 하나 가지고 이렇게 큰 세상을 담고 세상의 아픈 사람을 어루만질 수 있다니, 새삼 영화의 위대함을 느낀다. 더불어 영화를 만듦에 있어 다른 무엇보다, 담고자 하는 대상을 먼저 생각해야함을 알았다. 돈이 없어 영화를 못 만든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한 것이다. 마이클 윈터바텀은 <인디스월드>에서 카메라 하나로 세상을 담을 수 있고 세상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고,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파키스탄에서 영국으로의 밀입국을 시도하는 사촌지간인 두 아프카니스탄인의 노정을 담은 <인디스월드>는 한편 픽션의 놀라운 승리다.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찍혀진 이 영화는 진정성을 더하고 조작되지 않은 감동을 전달하고 있으니 또 위대하다. 설산을 넘어 국경에 접근할 때의 초조함과 불안감, 위태로움의 감정을 잡아내는 카메라를 보라. 겨우 눈동자와 형체만 보이는 이 장면은 광원이 부족해 억지로 밝게 색보정을 본 듯한 데 그 때문에 더더욱 거친 입자의 아픈 아름다움이 느껴지며 사실감이 든다. <인디스월드>는 2003 베를린 영화제서 금곰상을 수상했다. [★★★★★]
10월 26일 일요일
-니체보-
환불이 안 돼서 일산에서부터 아침부터 달려와 본 영화. 하지만 하마터면 또 좋은 영화 한 편을 놓칠 뻔했다. 그러나 이 영화 <니체보>(독일/2003년/86분)로 인해 하루가 힘들었다. <니체보>는 내가 고른 이번 영화제 영화 중에서도 허무의 극치였다.
동독의 한 한 시골마을에서 벌어지는 청춘들의 生의 맛은 예전에 나도 맛보았거나 여전히 떠오르는 떨쳐버리고 싶은 기억이다. 미래 없는 하루의 生. 어서 죽고 싶은 生. 기차가 오는 철길 위에서 섹스를 하고 아무렇게나 차를 몰고 질주하는 그 청춘은 결국 운명의 놀음에 의해 죽음으로 끝이 난다.
<나는 소녀가 아냐> 보다 성장의 고통 무게가 매우 무겁게 그려져 있는 <니체보>는 짙은 음울함 속에서, 아무데나 카메라를 들이대도 멋진, 마치 청춘의 한 때 같은 아름다운 영상으로 고통의 그들을 오래도록 기억케 만든다. 2003 베로나 국제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 수상작. [★★★☆]
<니체보>를 보고난 후, 갑작스레 해일처럼 쓸쓸함이 밀려와, 예매해 두었던 모든 영화를 취소했다. <키스 오브 라이프> <레스피로> <성난바다> <내 이름은 노이>는…, 또 언젠가 만날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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