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더군 영화제 가다

2002 서울 독립 영화제 장편경쟁 1 <경계도시>


글: 성재원
2003년 01월 01일

몰래 카메라에 망령이 찍혔다! 커피숍에서 소름 끼치도록 두려운 망령의 형체가 디지털 필름에 잡혔다. 그 망령은 강석필 프로듀서로 하여금 영화 <경계도시> 상영을 하지 말도록 망언을 하고 있었다. 조근조근 음산하게 말이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 대한 민국은 여전히 망령이 활개를 치고 다니는 나라다. 자유로이 날갯짓을 한번이라도 할라치면 망령에 씐 자들이 어느 틈엔 가 옆으로 다가온다. 그리고는 꺾인 날개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거라 속삭인다. 이 망령은 다름아닌 박정희의 망령이다. 일명 레드 콤플렉스라고도 한다. 오래 전에 이 땅에서 육신은 사라졌지만 영적 존재로 살아남은 망령은 끊임없이 자유롭고픈 산 자의 영혼을 제물 삼고 있다.

영화 <경계도시>를 짚는 영혼의 코드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스크린을 전율시킨다. 영화는 먼 이국 땅에서 쓸쓸히 삶을 마감했던 작곡가 윤이상 씨에 대한 때늦은 진혼제의 결실이다. 망령을 물리치기 위한 푸닥거리는 살아남은 자의 꿈 속에 문익환 목사님의 영혼이 나타나 계시를 주면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망령의 집요한 방해공작으로 33년만의 귀향이 수포로 돌아갔을 때 그를 기다리던 한국의 지인들은 눈물로 씻김굿을 해야만 했다. 오랜 망령의 억압에서 삶을 등진 수많은 영혼과 살아남은 자들의 영혼을 위한 씻김굿의 슬픈 울림은 관객의 심령과 공명하며 또 공명한다.

중저음으로 울리는 영혼의 코드 위로 현세의 내러티브 선율이 영롱하게 퍼진다. 송두율 교수와 서울 민주화 단체 인사들은 첨단 장비로 교류한다. 국제 전화로 동지의 목소리를 가슴에 갈무리하고 화상통신으로 독일 저택에서 서울의 대학생들과 대화를 한다. 오랜 친구인 시인 김지하와 녹화 테잎으로 안부를 전하고 고국의 지인들에게 꿈과 희망을 고이 담아 보낸다. 이미지와 기호의 교환은 망령이 쳐 놓은 경계를 넘어서지만 허물기에는 역부족이다. 신뢰와 감사, 애정의 밀도는 감소되지 않고 온전히 주고 받지만 보이지 않는 경계의 안과 밖에서 나뉘어져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망령의 훼방에 좌절했음에도 송교수의 목소리는 변함이 없다. 평상 톤 이면에 숨겨진 분노와 슬픔, 의연함의 감정은 다시 경계를 넘어서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잘 벼려진 칼로서 경계를 향하는 송교수의 지성과 내면은 명쾌한 가사가 되어 경계 위를 넘실거린다. 기본적인 통일 이념의 전제인 ‘내 속에 들어있는 타자’로서 남과 북의 상호인식을 강조하고 체제에 대한 양자 택일 논리를 거부하고 있다. 독창적인 내재적 방법론은 경계 안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한편 북한의 ‘주체’라는 개념에 대해 뷔트켄 슈타인의 명제를 빌어 건설적인 비판도 감행한다. 그의 일련의 사유는 아버지의 죽음과 오랜 세월의 고난으로 단련된 강인한 소리다. 통일에 대한 경계인의 사유가 담긴 인고의 소리다. 이 소리에 화답하여 시인 김지하는 오랜 지인 송교수를 향해 걸죽한 막걸리 한 잔을 권한다. 친구여 어여 일단 들어오라고 보고싶다고 투정부리 듯 한마디 영상에 담아 보낸다. 친구의 온 삶이 담긴 신념의 문제가 걸리지만 정을 앞세워 보고싶다고 애닯게 을러댄다. 망령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냐는 가벼운 농담조의 말투에서는 시인의 닳고 달은 삶의 진득함이 느껴진다. 시인 덕분에 잠시 웃는다.

훠이~~ 훠이~~ 홍형숙 감독의 다큐멘터리 <경계도시>는 푸닥거리다. 한국의 현재를 암울하게 지배하는 망령을 물리치기 위한 디지털 시대의 슬픈 푸닥거리다. 서울시 중구 태평로의 조선일보사옥 앞에서,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한나라당사 앞에서, 서울 서초구 내곡동 국가 정보원 앞에서 벌이는 푸닥거리다. 필름은 차분하게 이제는 제발 대한 민국에서 사라져 저 평안의 황천 땅으로 가 곱게 곱게 살라고 푸닥거리를 하고 있다. 죽은 것이여 산 자를 그만 괴롭히라! 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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