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더군 영화제 가다

2000 부천판타스틱국제영화제 개인적으로 들여다보기


글: 부천국제영화제에 일했던 어느 스태프
2000년 10월 10일

그가 내 방으로 찾아오던 날을 생각한다.
'청각에 강한 여자들과 시각에 강한 남자들...'

프로그래머 교체가 질적 저하를 가져온 올해 부천
목소리 멋진 남자가 여자들에게 환호 받고, 보기 좋게 예쁜 여자가 남자들에게 사랑받는다? 그래서 여성들은 전화를 좋아하고 남성들은 사진이며 인터넷 포르노 사이트를 친구인 양 껴안고 산다? 신의 명작품인 남/여, 여/남의 본능적 차이를 시각과 청각으로 관람해버리는 명작품들이 시대가 오기 전, 그가 내 방으로 찾아오던 날은...아마 다행스럽게도 그 전의 어느 날 이었을 것이다. 모든 일에 법칙이 있다면 법칙에는 항상 어느 정도의 예외가 따른다. 나는 그 예외의 교집합 원소중의 하나다. 보통 여자들에 비한다면 나는 전화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며 들려지는 것 앞에서는 늘 경직되어 있고 초조함을 견뎌내기 위해서 볼펜을 돌리고 손톱을 깨물 정도로 그것에 친숙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해 반해 남성들에게 강하다는 시각적인 것들 앞에서는 금새 큰 반응을 보이고 편한하게 다리를 꼬거나 대단한 영감을 얻은 듯 즐거움의 시를 읊는 것이 내 솔직한 모습이다. 시각적인 것. 그 중에서도 조각조각이 가진 이미지에 휘둥그래지는 내 자신의 눈을 바라보는 나. 아마 그때쯤 무성영화라는게 내 방문을 두드렸던 것 같다. 서커스에서나 볼 수 있었던 무성의 동작들이 지닌 어렵고도 알 수 없으면서도 때로는 웃음을 자아내는 수많은 의미들. 내가 반했던 건 X등급 영화속에서 은밀하게 신음소리를 내는 그것들이 아니라 화면 가득히 보이는 배우들의 수많은 표정들이 지닌 그만의 이미지였다.

지금 사람들은 절대로 혼자 영화를 즐기지 않는다. 절대 고독을 즐긴다면서 '혼자'를 분위기 있게 외치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혼자 영화를 본다는 그 자체는 말 그대로 외로움 그 자체일 뿐이다. 지금 영화는 무성영화처럼 말이 없는 영화도 아니며 말도 많을 뿐만 아니라 강한 빛도 가지고 있고 그만큼 강한 노랫소리도 가지고 있는 만능의 상자가 되어버렸다. 강한 빛과 소리로 혹은 이야기로 세상의 수많은 남과 여를 자극시키기 위해, 발달된 언어와 발달된 조각의 이미지들로 정말 솔직하게 모든 것을 공개하는 상자.

이제는 그 많은 상자들이 사람들 각자의 방으로 찾아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쉽게 그들을 만날 수 있고 필름마켓이며 한 나라의 문화산업을 보여주는 듯 준비된 영화제들을 통해서 우리는 수입사측이나 특별한 영화관계자가 아니더라도 쉽게 영화가 주는 감각적 자극을 받을수 있는 상황을 갖게 되었다. 더더군다나 1회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가 킹덤을 통해 심야상영의 시작을 알리면서 이제 영화는 방구석에 쳐박혀 혹은 날잡아 극장을 찾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쉽고 편하게 사람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해 주었다. 판타스틱 영화제. 아마도 조금은 고집스런 부산영화제와 아직 태어난지 얼마 안된 전주영화제에 비한다면 가장 대중과 가까울 수 있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영화제가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일 것이다. 그렇다면 4회 째 관객들과 함께 했던 부천국제 판타스틱 영화제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자극시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렸을까? 그것이 자극에만 그쳤을 뿐 아무것도 남지 않은 판타스틱한 꿈과 환상에 그쳤던 것은 아니었을까?

4회 째를 맞이했던 올해의 영화제에서는 여느 때보다 관객들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었다. 프로그래머가 김홍준 감독에서 정초신 프로그래머로 바뀌면서 그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던 김홍준 감독님을 그리워했던 사람들도 많았고 영화선정에 관한 문제들 때문에 새로운 프로그래머를 비난하는 글들도 인터넷 게시판을 가득채웠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경쟁작들이 예년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 경우가 많았고 아무래도 주최측의 새로운 프로그래머가 처음 등장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관객들의 비방이 늘어나던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관객들의 불만은 그렇다 할지라도 자원봉사 분들이며 스탭들의 불만은 그것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영화제에서 영사사고와 같은 사고들이 일어나면 관객들도 어느 정도 이해를 해주기 나름인데 총책임을 맡게되는 프로그래머가 사과방송이나 인사치레 정도의 관객들에 대한 예의도 없이 영화제를 진행했다는 비난이 그것이었다. 예년의 영화제에서는 사고상황을 대비해 항상 프로그래머가 자원봉사 분들을 챙기고 극장을 옮겨다니며 자리를 지키는 모습을 보여왔는데 예년부터 영화제 일을 해오셨던 분들은 이번 영화제에서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고 지적해 주시기도 했다.

그리고 관객석의 너무 많은 인원이 아이디카드 소지자로 채워졌기 때문에 영화인만을 위한 영화제가 아니었나 하는 말도 많이 나왔고 전체적으로 영화를 보러왔던 관객들이며 주최측이며 영화를 통한 만남의 자리에 대한 예의가 너무나도 부족했던 것으로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폐막식 날 수상작품에 대해서도 의문과 불만을 가졌었는데...그야말로 시각에 강한 남자들과 청각에 강한 여자들을 돈줄로 노리듯 치뤄지는 깜짝파티의 영화제라면 어릴 적 내 방과 내 마음을 매워주던 소리 없는 무성영화의 끝없는 꿈들보다 덜 아름답고 덜 의미 없는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영화제를 준비했던 자원봉사분들이나 스탭 분들 중에는 부천영화제가 앞서 말했던 것처럼 영화를 사랑하고 꿈꾸는 많은 관객들을 위해 존재하기를 바라며 보이지 않게 신경쓰고 땀흘려 노력했던 분들도 계셨다. 현장에서 일하셨던 분들과 관객들간에 가장 기쁨을 주었던 일은 무엇보다도 부천 상영관 중에서 가장 규모가 작았던 소향관에서 일하셨던 분들의 노고에 대함이었는데 아마도 인터넷 게시판에 가장 많은 칭찬과 격려를 받았던 상영관이 소향관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는 꿈이다. 이티(E.T)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날아갈 수 있는 꿈이며, 병원의 시체들을 소리지르며 만날 수 있는 악몽일수도 있는 꿈이다. 소리소문 많은 영화제였지만 상당한 거리로 떨어져 있는 몇 개의 상영관을 돌아다니면서 일주일 정도 꾸었던 꿈 중엔 올해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뽑혔던 올해 최고의 꿈도 한편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꾸었던 꿈을 소개해 볼까? 예정에 없이 올해 최고의 영화라는 둥 소리지르며 꾸었던 부천에서의 꿈은 <포르노 스타>라는 일본작품이었다. 영화라는 게 마냥 즐겁고, 그러다가도 슬퍼서 눈물을 훌쩍거리면서도 왜 내 올해 최고의 영화 제목이 '포르노스타'였고 부천영화제의 작품이었는지 궁금했던 적이 있었는데...내가 좋았던 건, 그냥 영화라는 만능의 상자 앞에 앉게된 수많은 낯선 이들과 그렇게 깔깔거렸던 건, 아마도 이 영화의 남, 녀 주인공이 타고 다니던 스케이트보드 때문이었던 것 같다.. 순간 중력을 잃은 듯 동경 시부야의 공중에 떠다니는 스케이트보드. 이 영화는 돈, 섹스, 마약, 사람 목 정도는 쉽게 구할 수 있다는 동경 파라다이스에 대한 꿈같은 이야기이다. 아마도 나는 이 영화 때문에 내 등뼈와 허리뼈의 하루를 책임지는 팔과 끈, 단추를 살 수 있는 돈이 그것들을 위해 쓰고도 남을 수 있는 어느 날이 되면 서슴지 않고 보드를 살 것이다. 그 꿈처럼 한달 정도 언덕 위에서 보드를 타면 나도 이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말할 수 있을까?

"세상에는 쓸모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아."

굳이 만능일 필요까지는 없는 수많은 감독들의 이야기들...그냥 내 방으로, 사람들 방으로 착하게 찾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3, 4년 동안 착하기 연습을 한다면...그 쓸모 없는 많은 것들을 다 버린 채 우리 앞에 영화와 사람들이 솔직하게 돌아올 수 있을까? 슬픈 사실이지만 아직까지는.....쓸모 없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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