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부산국제영화제: <몽상가들>에서 <잼필름스2>까지
글: 이종열
2003년 10월 12일
2003.10.2-10.5
영화표 예매 전쟁에서부터 직장에 거짓말하고 영화제에 가기까지, 로우 예 감독을 만나고 여러 미지의 영화를 만나기까지 올 부산영화제도 추억으로 가득하다.
[10월 2일 목요일]
출발 10분 전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 겨우 도착, 부산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은근히 기대했던 옆 좌석은 역시나 현실. 필름2.0을 보며 비좁은 버스 좌석에서의 불편함을 덜었다. 옆 좌석은 쿨쿨. 뒷좌석은 시끌시끌. 간간이 영화 <비밀>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운전사 졸음 운전을 우려했지만 나는 무사히 부산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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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수가. 부산버스터미널 이전을 몰랐던 나는 새벽 2시에 허허벌판에서 방황했다. 여관 하나 없다니…. 하는 수 없이 택시를 타고 범어사역까지 가서 여인숙엘 들어갔다. 하룻밤 만원. 허걱. 아직도 이런 곳이 있다니. 공동 샤워실이면 어떠냐. 찬물만 나오면 어떠냐. 숙소비를 아끼지 않았느냐. 우하하. 하지만 방음이 안되어 밤새 차 소리에 한 숨도 못 잤다.
-몽상가들-
남포동에 도착해 간단히 김치찌개로 요기를 했다. 첫 영화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이었다. 영화는 기대를 장대로 훌쩍 뛰어 넘어 저 하늘 꼭대기까지 다다랐다. 이 영화는 영화광을 위한 <시네마천국> 2편이다. <시네마천국>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선물이었다면 <몽상가들>은 보다 영화에 빠져 사는 씨네필들을 위한 선물이자 독촉장이다. 나는 선물을 펴보곤 더욱 더 깊어지게 만드는 영화중독에 뜨거운 눈물을 흘렸으며, 독촉장을 펴보곤 행동하지 못하는 나의 영화 열정에 대해 반성하며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 [★★★★☆]
-그의 형제-
<몽상가들>에 대한 감동 여진이 채 꺼지기도 전에 대영시네마로 가, 파트리스 셰로의 <그의 형제>를 봤다. 이 영화를 택한 데는 부산으로 오기 전 기자시사회로 본 <정사>(원제: 인티머시)에 대한 만족 때문이었다. 영화는 <정사>보다 더 긴 호흡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형제의 마지막 소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소 무거운 분위기의 영화였지만 파트리스 셰로라는 감독의 영화에 새로이 주목하게 했다. 극장문을 나선 여자 관객 몇은 영화 속의 전신 털 깎는 장면(난 그 장면이 가장 좋았다.)에 대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중 한 명은 영화제 따위를 찾을 것 같지 않은 미인이었다.(이런!) [★★★☆]
-하드럭 히어로-
세 번 째 영화 <하드 럭 히어로>는 정남이와 함께 봤다. 부산 사는 정남이는 몇 해 전 부산국제영화제서 만났다. 친구가 심야에 남포동 영화거리에서 헌팅 했는데, 그 이후로 영화제 때마다 만나는 아주 친한 사이가 되었다. 일본의 인기그룹이라는 V6가 출연하고 사부 감독이 연출해 화제를 모은 <하드 럭 히어로>는 초반엔 재미난 설정으로 웃음을 줬지만 뻔한 구성과 전개로 뒤로 갈수록 흥미로움을 잃었다. 그렇지만 나의 관심은 정남이와 재미나게 노는 것. 우린 칼국수를 먹고 영도다리를 멀리서 구경하고, 남포동을 한바퀴 돌며 지난 2년 간의 얘기를 했다.(난 지난해 영화제를 찾지 못했다.) 함께 사진을 여러 장 찍고는, 나는 다음 영화를 보러가야 했기에 내년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아쉽게 헤어졌다. [★★]
-후나키를 기다리며-
10월 3일의 마지막 영화는 <후나키를 기다리며>가 되었다. 영화는 해운대 메가박스에서 상영되었는데 관람 전 마침 씨네라인의 양유창 기자와 평소 멀리서 훔쳐보던 정영선씨(씨네라인 필진, 방송작가)를 만나게 되었다. 졸라서 영선씨와 사진 한 장 찍고 안 조르고 양유창씨와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후나키를 기다리며>는 매우 웃기고 연출력도 돋보이는 수작이었다. 영화 제작비를 가지고 올 후나키를 기다리며 시골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두 남자는 일본 소시민들의 쓸쓸한 현실과 마주한다. 영화는 이를 <키쿠지로의 여름> 스타일의 드러내지 않고 반 박자 늦게 반응하는 딴청 피우는 유머로 슬픔을 전한다. 은근히 웃겨버리는 배우들의 연기, 눈으로 덮인 겨울바다, 만나게 되는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한 사람들, 해결 없는 심심한 엔딩 모두 좋았던 기대 못했던 발견이었다. 올 영화제는 이 영화만으로도 만족이다. [★★★★]
영화가 끝난 후 기쁜 마음으로, Daum에서 제공한 숙소에서 같이 묵고 있는 '영사사' 사람들을 해운대서 만났다. 열명 남짓 되는 사람들은 서로 가볍게 대화를 나누며 맥주를 마셨다. 더 즐기고 싶었지만 다음 일정으로 인해 숙소로 돌아가야 했다. 그렇지만 서둘렀다는 것이 새벽 3시! 내일은 영화 5편을 봐야 하는데….
[10월 4일]
어제의 술과 불면으로, 그리고 밤새 누군가의 코곪으로 인해(나는 그녀가 누군지 알고있다. 헉!) 피곤했지만 영화관으로 향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우선 Daum측에서 제공하는 밥을 먹은 후 10시 첫 영화를 보러 Daum측에서 제공한 버스를 타고 메가박스로 갔다.
-주말연인-
수면과의 전쟁으로 괴로웠던 로우 예 감독의 <주말연인>은 독립영화의 시선으로 거칠게 중국 청춘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 다소 실험을 하고 있는 이 작품은 <수쥬>를 기대하고 갔던 나의 눈을 무겁게 했으며 몸을 가만히 있지 못하게 만들었다. 멀리 至尊군을 보니 녀석은 이미 고개를 꺾고 잠나라로 들어가 있었다. 부럽다. 그렇지만 영화 상영 후 있는 감독과의 대화시간엔 둘 모두 정신이 말똥했다. 지존이를 포함한 관객들은 질문들을 많이 던졌는데 로우 예 감독의 인기를 새삼 실감케 했다. 나중에 그와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웬일인지 눈을 감아 버렸다. (이제서야 자는 게야?) [★★★]
-희미한 불빛-
메가박스에서 남포동으로 이동, 두 번째 영화인 <희미한 불빛>을 보았다. 남들은 다 졸기 바빴다지만 난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을 좀체 진정시킬 수 없었다. 여러 마이너의 절망적인 현실을 냉정하게 다룬 이 영화는 동시에 여러 삶을 다루면서도 혼란 없이 숨가쁘게 카메라를 분배한다. 곧 꺼질지도 모를 희미한 불빛과 같은 그들의 각박한 삶을 보며, 그나마 작은 행복을 느끼며 살고 있는 나를 위안했다. [★★★★]
-자주빛 나비-
기대가 컸던 세 번째 영화 <자주빛 나비>는 격정적 감동은 밀려오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이미지와 스케일에 취했다. 로우 예 감독은 큰 자본을 만나 시대적 혼란의 1930년대 상하이를 비장미 넘치는 감각적 기운으로 담아낸다. 그 시대적 공기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스타일리스트로서의 면모는 뛰어나나 그 이상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장즈이와 나카무라 토오루의 연기는 매우 감동이었다. [★★★☆]
-엘리펀트-
하루 다섯 편 영화관람은 무리라 생각되어 포기할까도 했던 <엘리펀트>는 정말 취소하지 않기를 잘했다. 이 작품을 패스했다면 나는 아마 부산에서의 영화 추억이 밋밋했었을 수도 있겠다. <엘리펀트>는 올해 처음 만난 별 다섯 개 짜리, A+ 영화다. 미국 고등학교에서 실제 일어났던 총기사건을 소재로 만든 <엘리펀트>는 특정한 플롯 없이 고교생의 일상을 좇는다. 월광소나타와 엘리제를 위하여가 화면 곳곳에 흐르는 가운데 카메라는 바람에 촐랑이는 물결처럼 움직이며 호흡을 끊지 않고 인물과 고루 만난다. 카메라의 심장과 박동수를 맞춘 나의 심장은 훌륭한 시를 만난 듯 영화 보는 내내 좋다, 라고 혼잣말했다. (마치) 태풍이 오기 전의 맑은 가을 하늘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 영화는 (마치) 태풍이 지난 간 뒤의 고요한 가을 하늘을 비추며 타이틀을 올린다. [★★★★★]
-자토이치-
급히 전철을 타고 수영만 야외상영장으로 이동하였다. 서두른 이유는 올 부산영화제 최대의 기대작으로 꼽은 <자토이치>의 상영시간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서둘러 움직이며 빵가게에서 빵과 우유를 구입하였다. 자리는 다행히 지인들이 맡아주었다. 곧이어 타이틀이 오르자 관객들은 환호를 질렀다. 비트 다케시(연기자로 분할 때의 이름)로 간만에 주역을 맡은 기타노 다케시는 시종 시원하게 칼을 휘둘렀다. 그러며서 그 특유의 코미디로 추위에 떨고 있는 바닷가 근처 야외상영관 내의 관객들을 흥분시켰다. 그러나 나는 갈수록 한기를 느꼈다. 다케시의 유머 화법이라는 것이 이전에 미치지 못했으며 새로이 등장시킨 뮤지컬적 요소도 색다르지 않은 우스개로 보였기 때문이다. 칼을 서있지만 연출은 평범했기에 그저 단체야외관람의 맛만을 느끼고 그 밤의 끝을 마무리했다. [★★★]
[10월 5일]
어제 술자리를 피하고 깊이 잠든 것이 새로운 아침을 상쾌하게 만들었다. 일찌감치 일어나 송정 숙소 근처 바닷가에 나가 거닐며 오늘 상경하게 될 아쉬움을 달랬다. 모래에 오늘 관람 예정으로 있었으나 다음 날 출근 걱정 때문에 취소한 <머나먼> <안녕, 용문객잔> <라자>를 파도가 가져가게 두었다.
-잼 필름스 2-
다시 부산극장으로 이동하여 본 영화제 넷째날의 마지막 영화 <잼 필름스 2>는 좋은 영화제 마무리를 하게 했다. 네 개의 단편을 모은 <잼 필름스 2>는 각기 다른 개성으로 현 일본 영화의 건강함을 보여준다. 그 중 관객들로부터 상영 중이건 끝나서건 소낙비 같은 박수를 받은 <일본식 전통-탁상공론>은 기지 넘치는 화법으로 웃다가 죽게 만든다. 시쳇말로 '여자 꼬시는 비법'을 전수하고 있는 이 단편은 허황된 거짓말 같지만 감독은 믿을만한 이야기로 둔갑시킨다. 재연드라마에서 보이는 그 설득력이 대단하다고 생각된다. [★★★☆]
'영사사'의 봉고에 실려 서울에로의 길고 긴 상경길에 올랐다. 올해도 많은 영화를 두고 와 아쉽다.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처럼 나처럼 영화에 환장한 이들에게 정부는 보조금을 주어 평생 쾌적한 영화관람으로 생을 살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정부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악착같이 돈을 모아 꼭 40대 이후엔 평생 영화제만을 돌아다니며 여생을 보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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