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카사베츠의 <그림자들> 2002 서울 독립 영화제(Siff) 개막작

멀더군 영화제 가다

존 카사베츠의 <그림자들> 2002 서울 독립 영화제(Siff) 개막작 :::

성재원 | 2002년 12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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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림자들>은 ‘충돌’이라는 슬로건으로 시작한 2002년 서울 독립 영화제(Siff)의 개막작이다. 충돌은 오래된 힘과 새로운 힘이 갈등하는 에너지다. 낡은 것은 과거를 지향하며 현실의 변화를 거부한다. 새 것은 변화하는 현실을 반영하며 변증법적인 미래를 실현시키는 주체다. 옛 것은 스스로 자신의 지위과 지배를 포기하지 않기에 역사는 항상 충돌을 수반한다. 한번에 갈아 엎든 조금씩 갉아서 붕괴시키든 말이다. 존 카사베츠 감독의 데뷔작 <그림자들>(1959)은 헐리우드 상업주의 시스템에 충돌을 야기한 독립 영화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Siff의 개막을 선포하기에 그만이다.

다른 감독들이 헐리우드 시스템과 타협하면서 작가의 반열에 오른 반면 그는 시스템과 충돌하면서 신화가 되었다. 스튜디오의 대자본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4만달러의 저예산으로 베니스 영화제를 접수했다. 이윤 중심의 스타 시스템에서 소외된 흑인 무명 배우들이 역동적인 스크린을 장악했고 이들은 재즈의 리듬을 따라 즉흥 연기를 펼친다. 존 카사베츠의 핸드헬드 촬영스타일은 고루했던 주류 대중 영화의 카메라 워킹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었다. 독특한 영화 스타일은 헐리우드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예술가로부터 비즈니스맨으로의 전향에 대한 저항에서 나온 것으로 이후 이는 독립 영화의 정신으로 이어진다.

1950년대 미국 청년들에게 퍼져나갔던 비트(beat)세대의 정서가 영화 <그림자들>의 자양분이다. 그 정서의 원형은 바로 백인 중심의 사회에서 겪는 흑인들의 절망감이다. 이것이 백인 중산층 청년에게까지 확산되며 사회에 팽배해진다. 저항, 일탈의 정서는 헐리우드 시스템과 갈등하는 존 카사베츠와 정서와 통하며 그것들은 스크린 곳곳에 배어있다. 영화의 도입부는 클로즈 업과 미디엄 샷으로 분할되는 역동적인 파티의 흐름과 그 속에서 조용하게 자신을 구석으로 소외시키는 흑인 베니의 자의식적인 정적인 동선이 충돌을 일으킨다. 흑인 3남매 중 둘째인 베니는 비트 정체성의 상징이다. 베니와 두 백인 친구는 기성 세대의 위선과 인종주의 대해 저항적이다. 정서와 의식의 공유는 피부색의 차이를 넘어 우정에 이른다. 하지만 그들의 저항의식, 절망감, 사회적 일탈은 무기력하게 반복되는 일상, 천박한 가벼움과 뒤섞여있다. 이는 필연적으로 대안의 빈곤으로 귀결되며 베니와 두 친구들은 허무하게 흩어져 제갈 길을 가버린다. 그러나 감독은 영화의 결말에서 3명의 청년 중 흑인 베니에게 집중한다. 미국 사회에서 가장 밑바닥에서 차별화 된 삶을 사는 흑인 베니에게서만이 사회에 대한 저항의 원동력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혈혈단신으로 베니는 자동차가 질주하는 대로를 무모하게 가로질러 건너간다.

베니가 미국의 사회적, 문화적 반항의 정서가 담긴 상징이라면 베니의 형 휴는 존 카사베츠 감독의 개인적 체험이 함축된 자화상이다. 소설가나 영화 감독 등이 첫 작품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하듯이 존 카사베츠 감독은 흑인 휴를 통해서 독립영화를 하게 된 개인적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휴는 클럽에서 활동하는 재즈싱어이다. 감성적 원형으로 흑인 노예의 한(限)을 담고 있는 재즈야말로 존 카사베츠 감독이 주류 시스템에 대한 예술적 분노를 담아낼 장르가 아니었을까? 재즈의 독특한 특징인 즉흥연주에서 비롯하는 자유로움은 그대로 영화 <그림자들>의 배경음악과 고정되지 않은 핸드헬드 방식의 촬영으로 이어진다. 휴는 자신을 상업적으로만 이용하려는 클럽의 백인 경영주와 늘 마찰을 겪으면서 예술가의 정체성에 심한 상처를 입는다. 재즈로 무희를 고객에게 팔아야 하는 휴의 현실은 카사베츠가 배우로 경력을 쌓는 과정에서 겪었던 체험의 간접적인 고백이다. 열악한 현실에서 위축될 수 밖에 없지만 나약해진 매니저 친구를 위로하며 희망을 다짐하는 휴의 의지는 이제 막 독립영화 <그림자들>로 데뷔하는 존 카사베츠 감독의 강한 충돌의 의지이다.

휴와 베니의 여동생 랠리아는 하얀 흑인이다. 외모는 백인이지만 혈통, 계보에 의해 흑인으로 규정되는 인물이다. 랠리아는 백인 주류 사회의 인종차별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드러내는 효과적인 장치이다. 랠리아의 외모를 보고 사랑에 빠진 백인남자가 그녀의 오빠를 보고 충격에 빠진다. 이 장면은 감독의 의도를 멋지게 형식화하고 있다. 일반적인 숏 리버스 숏으로 진행하는 상호간의 대화나 시선의 교환이 이루어지지 않고 미디엄 샷과 클로즈 업으로 빠르게 편집되고 있다. 랠리아가 흑인 오빠, 친구하고 반갑게 포옹하며 떠드는 장면이 미디엄 샷으로 그들을 곁에서 난감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백인을 클로즈 업으로 빠르게 교차편집하고 있는 것이다. 흑인들을 백인의 시선으로 대상화하면서 반면 백인은 제 3자의 시선으로 관객이 판단하게 하고 있다.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은 자유롭고 다소 느슨한 반면 몇몇 장면은 속도감이 강하며 감정의 고양이 이루어지고 있다.

휴, 베니, 랠리아 이 3명의 주인공은 뉴올리안즈 재즈 스타일의 트럼펫 ·클라리넷 ·트롬본 3관편성을 연상케 한다. 재즈 뮤지션으로서, 건달로서, 글 쓰는 사람으로서 자신만의 공간에서 생활을 독주하다가는 다시 가정에서 사랑하고 갈등하고 화해하는 식으로 각각의 삶을 합주하기도 한다. 이들의 삶에 드럼이나 색소폰처럼 개입하는 다양한 존재들은 주인공들의 삶에 변화 혹은 충격을 주며 더 넓은 개념으로 하나의 생을 완성해간다. 아울러 영화도 그렇게 완성되어 간다. 존 카사베츠 감독은 인종문제나 비트세대의 현상등 하나의 소재에만 집착하여 그것을 중심으로 영화를 구조화하지 않고 있다. 말하자면 재즈식으로 현실을 이렇게 혹은 저렇게 변주해내고 있는 것이다.

존 카사베츠 감독은 <그림자들> 이후 헐리우드 시스템과의 타협물로 'Too Late Blues'(1961), 'A Child Is Waiting'(1962) 두 작품을 내놓았다가 스튜디오와 불화를 겪으며 대중의 무관심 세례를 받기도 하고 1968년 독립 제작한 <얼굴들>을 내서 큰 성공을 하기도 한다. 일련의 필모그래피에는 여러 훌륭한 작품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반-헐리우드적인 영화를 만드는 독립 영화 감독으로 태어나는 작품 <그림자들>은 단연 의미가 깊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