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군의 공포영화기행

<회로> 커뮤니케이션의 부재, 고독한 인간들


글: 원상이
2002년 01월 25일

회로(回路)

감독 : 구로자와 기요시
주연 : Kato Haruhiko, Aso Kumiko

2001년작

탁군이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를 처음 접했던 건, 한 2년전 쯤에 서울의 어느 극장에서 열렸던 미개봉 영화 영화제에서였다. 사실, 처음 그 곳에 갈 때만 해도, 큐어라는 영화가 세상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던 때였다.

코엔형제의 '위대한 레보스키'를 보러갔던 탁군은 시간이 남아 '큐어'를 선택했고, 영화를 보면서 정말 오랫만에 짜릿한 전율 비슷한 감정까지 느꼈었다.

하지만, 그렇게 잼있게 봤던 '큐어'도 두 번째 감상에서는 지루한 영화로 새롭게 다가왔으니 기요시의 영화는 어느정도 탁군의 기억에서 잊혀지고 있었다.

( 여기엔 기요시의 핑크영화인 '도레미파 소녀의 피가 끓는다'도 한 몫했다. 난해한 이야기 구조에 괴이한 주인공들..... )

그래서 이번에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기요시 영화제에 가면서도 이게 과연 잘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반신반의하고 있던 참이었다.

일단, 그의 최신작인 회로를 본 지금은, 탁군의 선택은 역시 옳았다는 것이다.

큐어에서 인물들의 지극히 일상적인 모습에서 갑작스레 찾아오는 광기의 순간을 정적으로 묘사했던 감독은 회로에서는 다른 방법으로 관객에게 공포심을 안겨준다.

영화는 일본 오컬트 영화의 공식을 충실히 따라가며 관객들에게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을 느끼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 사실, 일본 오컬트 영화의 공식이라기보다는 나가타 히데오의 '링' 영화 한 편에 가까운 분위기이다. )

금방이라도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의 음악, 서서히 등장인물들을 향해 다가오는 영혼의 존재 ( 이 영혼이 다가오는 모습은 갑작스레 춤을 춘다는 (--;; ) 점에서 링 제로의 사다꼬를 떠올리게 해준다. )는 일본 호러영화만에서 느낄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를 그대로 재연해준다.

하지만, 기요시는 영화를 단순한 공포영화로 만들지는 않았다. 공포영화의 장르안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성공적으로 담아냈다고나 할까.

영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현대에 와서 드러난 커뮤니케이션의 부재에서 오는 인간의 고독.

인터넷에 중독된 등장인물들은 모두가 고독하다. 그들은 항상 상대방의 모습을 컴퓨터 화면을 통해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지만, 그래도 그들은 고독할 수 밖에 없다.

여주인공 하루에는 남자 주인공 카와시마에게 말한다. '이들이 유령과 다른 점이 무엇이 있냐고.' 결국 죽은 후에 고독함을 느껴 인간들을 다시 죽음으로 이끄는 유령들과,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죽음이란 결국 똑같은 고독의 시작이다. 유령의 존재를 실제로 보며 '난 혼자가 아니었다'라며 웃음짓는 하루에는 그들에게 이끌려 죽음을 선택하지만, 결국 남자 주인공에게 말한다. " 도와달라"고.

그런 점에서 볼 때, 마지막 장면은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은 막나간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극단적인 결말을 이끌어낸다.

세계의 파멸. 저 쪽 세계에서 ( 사후세계를 떠돌던 영혼들이 이 쪽으로 넘어올 수 있었던 계기는 인터넷이다. 고독을 치유하려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인터넷을 통해 절대고독의 존재들이 넘어온다니, 아이러니한 설정이 아닐 수 없다. ) 넘어온 유령들에 의해 도쿄를 비롯해 전 세계의 인간들이 모두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 중 살아남은 여주인공 미치는 고독한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주변인물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난관을 '함께' 헤쳐나가려는 모습으로 영화내내 그려지고, 그런 그녀에게는 죽음조차 범접할 수 없다.

( 중간에 상대방을 상처주느니 아무 것도 안 하는게 좋다는 사장의 말을 듣고도, 그녀는 친구를 도와주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

반면에, 카와시마의 경우는 인터넷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고독감을 느끼고 처음으로 인터넷을 시작하려는 찰라에 유령과 맞부딪혔던 경우로 결국 그 역시 죽음의 고독의 유혹에 빠져들고 만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공포영화의 장르적 공식 아래 인간과 인간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의 단절과 현대 인간의 고독이라는 주제를 표현해내고자 했던 것이다.

비록, 미치가 살아남음으로 해서 인간은 함께 살아가면 좋다라는 상당히 단순하고 교훈적인 내용으로 마무리 짓는다는 것이 마음에 조금은 걸렸지만, 탁군은 정작 만든 감독이 아니니 그가 무슨 생각으로 미치를 살렸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는 법이다.

사실 영화는 조금은 지루할 수도 있다. 탁군도 두 사람의 주인공이 각자의 독립된 스토리를 가지고 왔다갔다 하는 복잡한 구조를 쫓아가느라 끝까지 버틴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 게다가 금지된 방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적어도 탁군의 기억엔 끝까지나오지 않았다. )

하지만, 일본의 심령 호러나 세기말적 분위기를 즐기는 관객이라면 꼭 한 번은 봐줄만한 영화로써 추천한다.

(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시민들이 사라진 황폐한 - 게다가 불길한 검은 연기가 상공을 뒤덮고 있는 - 도쿄 시내를 질주하는 장면에서의 암울함은 풀치의 비욘드 마지막 장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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