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비홍> 사다리 위의 발레

숨겨진 영화를 찾아서

<황비홍> 사다리 위의 발레 :::

성재원 | 2003년 01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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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황비홍>의 영문 제목은 Once Upon A Time In China 이다. 이탈리아 감독 세르지오 레오네의 서부 영화 <옛날 옛적 서부에서>(Once Upon A Time In the West)과 거의 흡사하다. 하나의 장르로서 서부 영화와 쿵푸 영화는 각각 그것이 위치하는 정치, 사회적 맥락에서 의미의 차이가 있겠지만 주인공과 악당이 대결하는 1:1의 형식은 동일하다. 사실 선과 악이 분명한 구도에서 선의 대변자인 주인공이 승리하는 것이 뻔하지만 서부영화의 1:1 대결보다는 쿵푸영화에서의 1:1 대결이 볼거리가 훨씬 풍부하다. 물론 감독의 연출 감각에 따라 팽팽한 긴장감의 수위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서부영화는 전희를 졸라 열심히 하면서 분위기를 고조시키다가 단 한번 쏴버리는 찰나의 행위로 마감하며 긴장감이 수직하강 한다. 솔직히 그 장면에서 졸였던 마음이 일순간에 무너지는 허탈감이 장난 아니다. 반면 쿵푸 영화도 최후의 일격으로 모든 것이 결단 나는 점은 동일하나 마지막 일격에 이르는 험난한 과정에서 몸과 몸의 격렬한 마찰과 운동은 그 여파가 꽤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것이다.

그런 감각, 감동의 여파가 유난히도 강했던 장면은 영화 후반, 미국 군함 안에서 광동 무인 황비홍(이연걸 분)과 산동 무인 엄진동(임세관 분)이 벌였던 격투씬이다. 이 장면은 2001년 프랑스 소설 삼총사를 소재로 한 미국, 독일 합장 영화 머스킷티어에서 어설프게 패러디되기도 하였다. 두 연기자의 탄탄한 무술 실력과 오랜 연기 경력은 기본적인 액션의 질을 보장한다. 전중국 종합무술대회에서 5연속 우승한 이연걸은 소림사 1,2,3 시리즈에서 검증 받은 배우이고 엄진동을 연기한 임세관은 남북취권, 당산비권(용권), 소권괴초 등 여러 쿵푸영화에 출연해 왔다. 매우 낯익은 얼굴이다. 두 배우가 선보이는 무술은 실제적이고 잘 다듬어져 있다. 고전적인 무협 영화에서 남발하는 초인적인 경공술이나 내공을 이용한 장풍 같은 비현실적인 무공은 보이지 않는다. 현란하고 폼 나지만 과연 실전에서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늘 발생하는 현란한 초식들 또한 자취를 감추었다. 물론 무술의 형식적인 잔재가 남아있긴 하지만 거의 실전 무술의 형태라 보여진다. 신비함이 사라진 무술의 성격이 힘겹게 근대화의 통과의례를 경험중인 청나라의 역사적 현실과 궤를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서극 감독은 시각적 화려함과 환상성의 공백을 특정 소품들과 현란한 카메라 연출로 비현실적이었던 쿵푸 액션을 현실적인 신비로 재구성하고 있다. 군함의 물자 창고에 세워진 많은 사다리는 두 사람의 공간을 이어주는 기능을 하면서 효과적으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도구로 쓰인다. 넓은 공간에 가로 세로로 얽힌 사다리 위에서 격투를 벌이는 인물들의 상황은 평평한 지면에서보다 훨씬 위태로워 보여 관객들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아울러 사디리 사이를 날아다니고 잠시 비틀거리다가 다시 딛고 서는 일련의 동작들은 신비롭지만 단순하고 비현실적이었던 경공술의 개념을 현실적으로 재구축하고 있다. 아이디어의 뛰어난 발상이 소품 사다리가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또한 공간을 가로지르는 사다리들이 형성한 구조물은 카메라의 위치선정과 역동성을 확장한다. 배우들 아래에서의 극단적인 로우 앵글을 비롯 액션을 다양한 앵글로 촬영함으로써 역동성을 배가한다. 익스트림 로우 앵글과 하이 앵글을 오가며 다이나믹하게 구사되는 풀 샷과 미디엄 샷, 클로즈 업 샷, 그리고 몸과 몸의 충돌이 빚어지는 지점에서 적절히 표현되는 슬로우 모션은 황비홍과 엄진동의 액션을 멋드러지게 묘사하고 있다.

황비홍과 엄진동의 무술은 일견 부드러움과 강함의 대결로 보이며 황비홍의 부드러운 무술이 승리하는 것에 별 무리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엄밀하게 보면 황비홍의 빠른 발차기가 특징인 무영각으로는 엄진동의 철보삼무공을 깨뜨리기는 다소 역부족으로 보인다. 철보삼무공은 영화 중반에 월가 철로도법과의 실전에서 가공할 위력을 선보이고 있다. 날카로운 도검이 뚫지 못하는 엄진동의 몸은 그야말로 강철과 같으며 100kg이 넘어보이는 무쇠의 충격을 견뎌내는 것으로 볼 때 그 내공의 수위 또한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외공을 위주로 수련한 무인들이 일정수준 내공도 갖추게 되는 것이다. 반면 황비홍의 무술은 부드럽고 정교한 강점이 있지만 파괴적이고 무쇠와 같이 단단한 엄진동의 철포삼무공을 분쇄히기에 필수적인 내공, 즉 몸에 축적된 충분한 기(氣)는 찾기 어렵다. 영화에서는 황비홍의 무예가 형성된 개인의 역사를 전혀 제시하고 있지 않다. 황비홍이 보이는 무술의 특징은 단지 빠르고 정확하다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황비홍이 승리하게 되는 과정은 권투나 격투기에서 적용되는 충격의 누적 효과 논리로만 설명된다. 빠른 황비홍은 거의 맞지 않는다. 나비처럼 유연하게 적의 공격을 피하면서 벌처럼 톡톡 적을 공격한다. 무려 7분이나 되는 격투장면에서 엄진동은 수도없이 얻어맞으면서 몸 안에 쌓인 충격으로 지게 되는 것이다. 황비홍이 공격 시점의 자세는 비틀거나 휘어지고 심지어는 회전하는 유형이 많다. 이는 발경(發勁)의 원리로써 그냥 내지르는 것 보다 내적인 파괴력을 배가하는 합리적인 동작이다. 그러나 황비홍은 물리적인 우세와 함께 심리적인 우세도 아울러 점하고 있다. 개인의 명예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황비홍은 결투에서 잃을 것이 없다. 다만 이겨야 하는 이유라면 사랑하는 사람과 민족을 위하려는 이타적인 이유이다. 하지만 엄진동의 경우는 개인적인 이유로 민족을 등지는 결정적인 심리적 부담을 안고 있다. 이미 결투에 임한 두 사람의 심리적 대결에서 엄진동은 패배를 예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실, 영화는 청나라를 침탈하는 미국, 영국 등의 제국주의 세력과 중국인의 갈등이 주요 갈등이다. 그러므로 액션은 선한 중국인과 악한 서양인의 대결로 이끌어가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그러나 총으로 적을 제압하는 서양식의 액션과 몸을 사용하는 중국식 액션 사이의 접점을 찾기가 수월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설프게 무술하는 서양인을 내세우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영화는 중국인 내부에서 민족주의자와 반민족주의자 간의 갈등을 내러티브의 동력으로 삼고 각각 그 대표로서 황비홍과 엄진동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쿵푸 영화로서 액션을 담아내려면 서양 제국주의자들에게 겨눠야 할 칼날을 내부로 향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상업 영화의 한계이자 숙명이랄수도 있겠다. 영화 초반에 보였던 섬세한 장면, 장면의 아름다움은 시간이 흐를수록 퇴색하는 기미가 엿보이나 황비홍과 엄진동이 떨어져서 혹은 함께 어우러져 펼치는 일련의 쿵푸 액션의 아름다움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