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름'이라는 영화가 시도한 몇몇 부분의 기획은 분명 헐리우드식 공포물과 일본식 공포물이 주는 공포와는 다른 느낌이지요.

제가 지속적으로 문제삼는 것은 공포영화의 관습적 도식을 피했다는 점이라기 보다는 무섭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싸한 공포를 자아내기 위해서 분명 감독은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성실해보이며 따뜻해 보이는 주인공이 사실은 옛애인을 죽였을지도 모르며

타의든 자의든 자신의 이복동생과 관계를 맺고 죽이지요. 고등학교때는 자신을 놀리던 친구를

뒷산에서 죽인 후 파묻어 버리지요. 그리고 그런 주인공과 함께 웃는 술취한 손님처럼

어느새 타인의 죽음에도 무감동해지는 우리까지 고려한 설정은 참으로 치밀하지요

인물들의 선을 알 수 없는 조명과 관객들에게 익숙치 않은 앵글들, 선영을 살해하는 장면의

그 불쾌한 롱테이크 샷. 분명 새로운 시도입니다.

그렇지만 그것들로 공포를 주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면들이 많았습니다.

우선 504호가 주는 저주에 대한 언급이 꾸준하고 지속적으로 보여지지만 외려 그런 꾸준하고 지속적인

언급으로 인해 마지막 장면은 그리 충격적이지 못하고 용현과 선영의 관계에 촛점을 맞추다보니

광태의 죽음에서 언뜻 비췄어야할 용현과 504호와의 관계는 흐려졌습니다. 은수가 광태의 죽음을

떠올리면서 탐정정도의 역할을 하였어야하는데 어느시점에서 은수는 그냥 평범해집니다.

분명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각기 어떤 역할을 하나씩 떠맡고 있기는 하지만

그 역할이라는 것이 어떤 방향성을 잃어버린데서 이 영화가 전달하려는 공포는 불명확해져버립니다.

선영과 용현과의 사랑을 외디푸스 컴플렉스와 결부시켜서 근친상간에서 오는 끔찍함을 유도하려고

하였다면 두사람에게서 좀더 인간적인 사랑의 모습을 그렸어야하지 않았을까요? 광태의 죽음이 504호의

용현의 등장을 암시하는 것과 동시에 504호에서 죽은 이의 저주의 끔찍함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였다면

단지 은수가 몇번 광태의 죽음을 언급하는 것이나 떠올리는 것으로는 부족하지않나요?

가장 껄끄러운 것은 이작가의 역할입니다. 그가 술에 만취한 상태에서 외치는 '쿨한 엔딩'이라는

대사는 이작가가 작품을 미리 엑스레이 사진찍어대듯 읊조리지 않았다면 정말 '쿨'하게 되지 않았을까요?

선영과의 관계도, 미정과의 관계도, 일반사람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용현의 비정상적인 가치관도,

다들 조금씩만 내비쳐있지요. 그런데 여기서 이작가는 그들과 다르게 모든 것을 드러내놓는 역할을 하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입니다. 보이지 않는 공포를 만들어 내고 싶었다면 이작가의 입과 손을 과감히

묶어버리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요?

목표을 잃고 여기저기로 실을 날리던 거미줄을 어느 한곳으로 날리기 위해 이작가는 그 실끄트머리들을 다 모아

504호와 용현과의 관계로 몰아가지만, 이미 중반을 넘어서면 용현과 504호와의 관계는 이미 알게 되어버립니다.

연출력과 연기력에 대한 님의 의견에는 동의합니다. 명확히 구분되는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지요. 연기자들의

연기를 얼마만큼 잘 끌어내느냐도 분명 연출력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저의 용어선택이 좀 불분명하였군요 ^^;;

분명 소름이 가지는 미덕은 있습니다. 좋은 연기자들을 발견했고 음침하고 탁한 도시를 닮은 조명빛을 잡아낸 것,

열린구조로 시나리오를 이끌어가는 것들이 그렇지요. 그렇지만 아쉽게도 무섭지 않았습니다.(적어도 저에게는..이라는 수식어를 달아야겠지요?)

'헨리: 연쇄살인범의 초상'에서의 연쇄살인범처럼 용현은 살인을 죄의식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결말에서 그는 경악을 하며 504호를 떠나게 됩니다.(이점이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그가 선영과 이복남매라는 점때문에

충격을 받았는지 그는 살인하는 자신을 두렵게

느끼며 떠나갑니다. 이 비일관적인 주인공의 인격도 분명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외려 집에서 계속 살면서 밥을 먹고 일을 하게 된다는게 더 어울리지 않을까요?

전체적으로 이 영화에서는 끝까지 감추는 것을 포기했기에 싸한 공포를 만들어내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쿨한 엔딩을 꿈꾸기에는 조바심을 낸 듯한 느낌이 드는 건 혼자만의 생각인지.. ^^;;